양성평등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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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평등에 반대한다.

  • 2017,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정희진, 교양인, 24page

그녀/그의 피부색이나 태어난 계급의 조건에 맞는 직업, 감정 표현, 옷차림, 섹슈얼리티, 가사 노동 등 일생 전반에 걸친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즉 “계급 역할(당신은 가난하므로 공부를 하면 안 된다.)”이나 “인종 역할”(당신은 흑인이므로 실업자가 자연스럽다.)” 같은 표현은 없다. 반면 성 역할(gender role, “여자는 애를 낳아야지”)이란 단어의 존재는 성차별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상의 정치인지, 젠더가 얼마나 인식하기 어려운 사회적 구조인지, 얼마나 탈정치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 2017,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정희진, 교양인, 24~25page

이 글 서두에 소개한 프랑스 여성 운동가들의 투쟁은 남성과 여성이 얼마나 비대칭적 존재인지를 재치 있게 보여준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성의 해’ 제정과 같은 일이 여성에 대한 특혜라고 생각한다. “여성부는 있는데 남성부는 없다.”는 식이다. 성의 구별이 “사회적 억압 제도”가 아니라 단지 ‘대칭 집단’이라는 사고 방식, 최근 몇 년 간 온라인을 중심으로 기승을 부린 극심한 미소지니(여성에 대한 혐오) 현상과 이에 대항한 여성들의 반응을 ‘남혐’으로 명명함으로써 절정을 맞았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서 한국 사회가 여성 집단에게 가장 많이 ‘취조’한 내용은 “여성주의는 일베와 다를 바 없다.”, “여험이나 남혐이나 같은 이혐이다.”, “여성의 저항에는 동의하지만, 일베와 같은 방식에는 반대한다.” 였다.

양성 개념의 문제 - 인간은 양성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이분법의 비대칭성

  • 2017,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정희진, 교양인, 27~28page

오늘날 이러한 인식은 상식에 속한다. 그러데도 인간은 여전히 만물의 영장이고 인간은 여성과 남성으로 뚜렷이 구별되며, 종의 재생산을 위한 출산은 여성의 생물학적 본질이라는 통념은 여전하다. 그리고 이를 거스르는 동성애는 비정상이라는 통념까지. 이러한 통념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우리의 통념을 재고해야 할까.

우리는 계급의 야극화가 신이 정해준 질서, 절대로 변화시킬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몸의 차이들 - 성별, 인종, 나이, 장애 등-은 그렇게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강하다. 특히 암수(SEX)의 구별과 그 ‘귀결(어떤 결말이나 결과에 이름. 또는 그 결말이나 결과.)’인 성별은 자연의 질서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양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고는 인류 역사 전반을 지배해 온 전제였을 뿐 아니라 그간의 언어와 사유 체계가 만들어지는 데 핵심 역할을 해 왔다. 이분법 짝(PAIR)의 논리가 그것이다. 이분법은 반반으로 분리도니 상황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체와 타자가 하나로 묶인 주체 중심의 사고다. 우리가 흔히 “남성 중심적, 서구 중심적, 미국 중심적, 서울 중심적 사고”라고 비판하는 논리는, 말하는 주체와 그에 의해 규정된 대상의 존재를 전제한다. 주체가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삼아 나머지 세계인 타자를 규정하는 것, 다시 말해 명명하는 자와 명명당하는 자의 분리, 이것이 이분법이다. 즉 이분법은 대칭적, 대항적, 대립적 사고가 아니라 주체 일방의 논리다.

이분법은 언어가 만들어지는 가장 일차적인 원리다. 언어를 만드는 사람은 자신과 다른 점을 의미있게 생각한다. 의미는 차이를 통해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성별을 포함해서 모든 차이는 이미 존재해던 것이 아니라 언어를 만드는 사람에 의해 규정된 것이다. 이분법적 사고의 핵심적인 문제를 세 가지다. 첫 째, 위계를 대칭으로 위장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은폐한다. 둘 째, ‘대립’하는 이항 외 다른 존재 혹은 다른 방식의 사고의 출현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셋쨰, 남성과 여성의 구분은이분법적 사고방식의 원형으로서 모든 언어의 모데, 척도, 기원, 전형으로서 인류르 지배해 왔다.

이 글에서 이분법을 문제 삼는 것은 이분법이 대칭적이지 않음을 밝히려는 것이지, 이분법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 2017,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정희진, 교양인, 31-32page

문제는 둘의 관계다. 어떤 A도 B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데, A와 B가 서로 어떤 위상으로 연결되어 있는가는 논쟁적이다. 주체와 타자의 논리에서 이분법이 대등한 A와 B의 관계로 작동하는 경우는 없다.

여성주의는 이분법이 A와 A가 아닌 것을 구분하기, 다시 말해 A를 기원으로, 규범으로, 진리로 만들기 위한 방식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백인 남성은 A가 되어 보편, 일반, 진리, 기준으로 작동하고 그들과 다른 것은 인간 외로, 다른 범주가 되어다. 물론 A는 백인 남성에 한정되지 않는다. 중산층, 이성애자, 서울사람, 젊고 건강한 사람, 외모, 학벌, 장애 여부 등에 따라 기준은 언제든 변화한다. 이처럼 이분법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를 위한 사고다. A가 아닌 것을 사용하고 배치하고 규정할 수 있는 A의 권력을 말한다.

성별들(geners) - 성별은 몇 개인가

남성과 여성, 그들은 누구인가 - 실제와 규범의 불일치

  • 2017,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정희진, 교양인, 36page

남성과 여성의 구별에는 ‘진정한 남성’,’바람직한 여성’이라는 전제가 있다. ‘뚱뚱하고 못생긴 여성’에게 ‘너도 여자냐.’라고 비하하는 행위나 고령의 여성이나 장애 여성ㅇ이 여성이라기보다 노인이나 장애인으로 분류되는 것은, 여성이라고 모두 여성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보다는 그 범위가 넓지만, 남성도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다. 남성들은 돈, 권력, 사회적 지위 등으로 남성성즉 증명해야 한다. ‘키가 작고 가난하고 대머리’인 남성은 ‘비남성’으로 취급된다. 남성 동성애자들이 흔히 여성 취급을 받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이 성별화된 사회라 해도 우리가 실제로 남성과 여성으로 인식하는 진짜 남성과 여성의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은 대단히 적다. 글서 부자 남성과 예쁜 여성이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성별 사회에서 여성은 외모나 나이, 남성은 사회적 자원 여부가 남성과 여성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모든 인간은 인간이지 전에, 남성과 여성이어야 하는 젠더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은 진정한 남녀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상대방의 기존 자원까지 갖추어야 하는 압력이 추가되었다. 요즘 여성은 젊고 예쁜 데다 능력 있는 개념녀여야 한다. 아줌마는 여성이 아니고, 노숙자 남성은 남성이 아니다.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이나 여성이되,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사회가 싫어하는’,’저렇게 되고 싶지 않은’,’바람직하지 않은’,’매력적이지 않은’,’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은 남성과 여성이 아니다. 한편, 갓난아이나 노인은 성별 범주 이전에 나이가 더 먼저 적용되는 구성원들이다. 이는 간혹 인종이나 특수한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무속인, 종교인, …)에게도 적용된다. 이처럼 남성과 여성은 문화적 구성물이며 규범의 산물이자 생물학적 분류가 아니다.

평등의 개념 문제

  • 2017,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정희진, 교양인, 45page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할 민주주의 가치이자 자유주의의 회고 이념으로 간주되는 평등은 사실 쉽게 부정될 수 있는 매우 ‘취약한 사상’이다. “모든 인간은 법 앞에, 신 앞에 평등하다.”는 정언은 특수성 담론을 앞세워 언제든 폐기될 수 있다. 특수성 개념은 예외를 만드는 배제의 정치의 핵심이다. 모든 현상은 일반화할 수 없기 때문에, 즉 하나의 버전일수는 없기 때문에 차이는 언제든 발생한다. 권력은 이 차이를 특수라는 예외로 만든다. 그러므로, 보편성은 권력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지 고정된 것이 아니다. 평등은 희망이자 지향이지 현실이 아니다.

  • 2017,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정희진, 교양인, 46page

몇몇 사람만 평등했던 영역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온다는 의미의 평등 개념에서는, 기존에 기득권을 누리던 사람들이 이질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 이질감은 누가 해겨해야 할 문제인가? 이 점이 ‘양성평등’이 정의로서의 평등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여성이 남성의 기준에 맞추는, 남성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의미의 평등은 그것을 실현하는 데도 수많은 어려움이 따르지만 이러한 의미의 평등은 특히 기득권 세력과 같아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문제다. 여성주의는 남성과 같아지는 것(‘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평등해지고 싶은데, 남성들 중 누구와 평등해질 것인가 역시 미봉된 문제다. 누구와 평등해질 것인가. ‘노숙인’,’빈민’,’알코올 중독자’와 평등해지고 싶은 여성은 없을 것이다. 최소한 양성평들은 남성 중산층과의 평등을 의미한다. 한편, 이러한 평등이 현실화되면 남성의 반발은 필연적이다. 즉, 남성 사회에서 양성 평등을 바라노느 전형적인 논리, “남성들끼리도 경쟁하기 힘든 판에 여자들까지 끼어든다.”는 이데올로기가 힘을 얻게 되고 여성에 대한 혐오로까지 발전한다 이처럼 양성평등은 갈등, 대립 논리일 수밖에 없다.

이중노동으로서의 평등

  • 2017,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정희진, 교양인, 48page

나는 당해 한국 사회의 여성 운동을 자유주의 여성운동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고 있다. 나는 이제까지 한국 여성운동의 실제 성격은 여성의 이해를 실현한다기보다 공적 영역 진출, 사회 참여, 여성의 노동과 역할의 확대였다고 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성주의 논리가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나의 입장은 여성 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아니다.

여성의 노동이 여성 주체를 가시화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를 여성의 지위 향상으로 평가하기에는 더 많은 논쟁이 필요하다고 본다.

  • 2017,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정희진, 교양인, 49page

정부 부청니 여성가족부의 공식 영어 명칭은 ‘Ministry of Gender Equality & Family’이다. 정부 기구나 여성 단체의 명칭뿐 아니라 일상적 대화에서도 영성평등은 의심할 여지 없이 페미니즘 그 자체이자 목표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gender equality’의 의미는 성별/들 간의 평등이거나 성별 제도로인한 차별 시정을 뜻하는 것이지, 양성 간의 평등이 아니다.

여성주의의 목적 중 하나는 사회 정의로서 성차별을 철폐(완화)하는 것이지 남녀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역사도 역사지만, 집단과 집단이 평등해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2017,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정희진, 교양인, 50page

가장 많은 이혼 사유 중의 하나인 가사 노동 분담의 경우, 맞벌이 남편은 일 년에 한두 번 하는 지하실 청소를 맡고 아내는 매일매일의 노동인 반려 동물에게 밥을 주는 것으로 분담에 합의를 본 것을 사람들은 ‘평등’하다고 말한다. 혹은 맞벌이 남편은 청소하고, 아내는 요리를 하는 것으로 ‘평등하게 가사 분담’을 한다. 문제는 남편은 일 주일에 한 번 청소를 하지만, 매일 아침밥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젠더가 작동하는 근본 구조는 변함없는 상태에서 자유주의 차원의 평등은 남성에게는 오해와 반발만을, 여성에게는 허울뿐인 평등을 약속할 뿐이다.

  • 2017,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정희진, 교양인, 52page

여성의 지위는 평가하기 어려운 지표이다. 경제력과 교육 수준이 높다고 해서 가정 폭력과 성폭력에서 자유로운 것도 아니고, 한국의 여성 지위가 특히 제 3세계와 다른 점은 교육 수준(최상층)과 노동 시장 진출(최하층)이 극도로 반비례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조에서 고학력 여성들은 비혼을 택하거나 노동 시장에 진출하는 대신 중산층 가정의 신화를 현실로 마드는 데서 자아를 실현하려고 한다. 여성들은 가족 내 성 역할에 충실함으로써, 특히 자녀 교육을 인생의 목표로 삼으면서, 한국 사회 특유의 가족주의를 만들어낸다. 학벌, 계급, 부동산 문제 등 사회 부정의를 양산하고, 여성에 대한 혐오를 가중시킨다.

비유하자면, <거대한 전환="">(칼 폴라니)에 몇 배에 해당하는 발본적(radical)인 변환이다. 이 글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국가는 국가 경쟁력을 위해 여성을 임의적, 일시적으로 '사용하고 버리기'를 반복하는여성 노동력 동원을 '일과 가정의 양립' 정책이라고 속이지 말고, 시민 사회와 여성 운동 세력은 여성의 과다한 노동 상황을 '여성의 지위 향상','여성 운동의 발전'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삼지 말아야 한다.

모든 남성이 최소 10년 이상은 집에서 아이를 키워야 한다. 그 전까지 국가는 절대로 아이를 키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육아에서 국가보다 남성 개인의 인식과 태도가 훨씬 중요하다고 본다. 국가는 남성을 따라갈 뿐이다. 육아가 여성 운동의 의제인 것 자체가 잘못이다. 육아는 남성의 성 역할이 되어야 한다. 남성도 여성이 겪는 육아와 모성으로 인한 죄의식, 스트레스, 자기 분열, 커리어 포기 경험을 겪어야 한다.

남성들은 자신의 삶에 아무런 변화 없이, 양성평등에 두려움을 느낄 것이 아니라 여성주의를 보편적인 사회 정의로 인식해야 한다. 동참까지 바라진 않지만, 한국 남성들은 자기 계발과 시간 기획처럼, 인간으로서, 가족 구성원으로서 자기 관리부터 선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